시간이 조금 지난 기억의 인터뷰였다. 2010년 3월 뮤지컬 콘서트 ‘무교동 꽃잎’이 공연 되기 전 기인과도 같은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전유성’ 씨를 만나게 된 것은 행운과도 같은 기회였다. 이 만남은 ‘소리새’ 신성철 씨가 힘을 실어주어 만나게 된 자리로서 한 번에 1970년대 80년대 문화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인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음은 시간이 지나고도 더욱 깊게 새겨진 기억이다.
대학로에 있는 예원예술대학교에서 이루어진 만남은, 그나마 그를 만나볼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능도 했다. 당시 전유성 씨와 이영자 씨가 이 학교에서 교수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이었다.
워낙 인터뷰를 안 하기로 유명한 전유성 씨와의 대화는 자리 자체가 귀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에 한 마디 한 마디가 귀하게 들려왔다. 30분 인터뷰 시간을 얻어 이루어진 인터뷰는 한 번 이야기가 되자 끊이지 않고 1시간 가량 진행이 되었다.
사실 전유성 씨의 성격상 30분이라고 했지만, 인터뷰가 재미없으면 10분에도 끝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1시간 가량의 인터뷰는 신선한 기억일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 시간이 길어진 것은 무엇보다 그가 향수로 가지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들이 나와서였을 게다. 원래 옛 향수가 젖어 있는 이야기들은 누가 끝내고 싶어도 잘 끊어지지 않는 것이 특성이었기 때문에 더욱 길어지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또한 행운이 있었던 것은 당시 뮤지컬 콘서트로 기획된 ‘무교동 꽃잎’에 전유성 씨가 연예부장으로 출연을 할 예정이었기에 가능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가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것은 혼자 생각해 보건 데 이유는 자신이 말하려 하는 것이 제대로 글로 표현이 안 되었기 때문이리라 생각이 됐다. 워낙 인터뷰를 하고 나면 자신이 한 인터뷰와는 달리 표현이 되는 것은 그리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기에 더욱 그러한 듯 보였다.
자유로움이 무엇보다 소중한 그에게 청도의 매력은 무척이나 소중한 일부처럼 들려왔다. 지금은 문하생이 얼마나 늘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두 번째 문하생을 받고 있다는 말은 너무도 멋지게 들린 말이었다. 그가 문하생을 뽑아 낸다면 그 실력이야 안 보고도 믿을 만 한 것일 테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하생을 뽑는 기준도 남다르다는 그의 기준은 들어봐도 놀라운 방식이었다. 학생을 뽑는 기준이 ‘선착순’이라는 말은 그 한 마디로도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이었다. 실력보다는 열의를 보고자 하는 그의 의도가 숨어있는 말처럼 들려 유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뽑았다고 책임을 지지 않는 전유성도 아니었다. 일단 그렇게 해서 뽑힌 문하생은 자신이 그만두지 않는 한 끝까지 책임을 진다고 하는 그의 말은 놀라움이었다. 2년 동안 무료교육을 해 준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게 해서 교육을 마치고 나니 15명이 최종 남더라고 그는 말했다. 버티는 한 책임을 진다는 그의 말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처음 몰려든 수십 명의 학생에서 남은 학생들의 열의는 뭐가 되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처음 문하생으로 뽑아 최종적으로 남은 아이들이 각 방송사에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한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멋지게 키워 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가 가르친 문하생 중에 방송사에 합격을 해 현재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예능인만 따져봐도 그 수는 엄청나다.
‘신봉선, 황현희, 박휘순, 김대범, 민경희, 조영빈, 안상태, 김신영, 양배추, 고창환, 황현민’
이 많은 이들이 방송사에 합격을 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게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처음 남게 된 15명 중 한 명은 연극 무대를 선택했고, 나머지는 모두 합격을 해 자신의 몫을 하고 있다는 말은 놀라움이었다.
개그콘서트를 처음 만든 장본인은 아닌가? 라는 질문에 그는 공을 백재현에게 돌렸다. 그러며 몰랐던 이야기를 해 주어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처음에는 개그콘서트가 아닌 ‘컬투’를 만들었고, 컬투가 <컬투쇼>가 되었다고 한다. 개그콘서트는 백재현의 기획으로 추진이 되었고, 자신은 선배로서 연출을 한 것일 뿐이라는 말은 깜짝 놀랄 이야기였다.
인터뷰 중 가수 이문세와의 인연 또한 이야기를 해 주며 흥미로운 시간을 갖게 했다. 처음 무교동 클럽 꽃잎에서 이문세를 만났는데, 만나자 마자 10분 정도 인터뷰를 해 보고 ‘아! 얘 될 것 같다’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노래를 시키고 한 달도 되지 않아 SBS의 <세븐틴>에 디제이로 추천을 해 줬는데 정말 잘해서 놀랐다고 한다.
이문세와의 인터뷰에서 느낀 확신은, 바로 이문세가 말하는 자세가 반듯했고.. 목소리도 아주 좋았다고 회상을 했다. 노래하는 소질도 좋았고, 좋은 곡을 만나면 틀림없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그를 눈 여겨 본 기회가 되었다고 말을 했다.
그가 기억하는 꽃잎은 젊은이들의 열정을 느낄 공간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연예인이나 가수를 꿈꾸는 사람들의 등용문이 되어준 쉼터 그 이상의 멋진 문화공간이었다는 것을 밝히며 생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예원예술대학교 사무실에는 그와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앉아 있어 자연스레 인터뷰에 동참을 하였고, 반가운 인물이었기에 인터뷰는 더욱 흥미로워졌다. 당시 무교동 클럽 꽃잎 사장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최송무 사장은 당시 오디오맨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워낙 전문가여서 그랬던지 꽃잎은 당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기기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젊은이들이 즐길 곳을 찾아서 떠돌던 시절이었기에 종로3가나 무교동 근처가 항상 북적 였다고 한다. 젊은 이들은 당시 좋은 시설을 갖춘 오디오 시스템이 있는 꽃잎을 자주 찾았고, 디제이 또한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붐빌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상대적으로 당시 종로3가와 무교동 쪽이 이런 시설들이 있었기에 젊은이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 중에 들려주었다. 명동의 쉘부르와 꽃잎은 최고의 문화 장소였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주는 인터뷰 자리였다.
지금은 중국집 사장님으로도 유명한 김학래 씨는 당시에 무척이나 유명한 인사였다고 말을 해 주었다. 당시 대학가에서 유명한 사회자로 명성을 떨치던 김학래와 같이 일하던 곳도 꽃잎이었고, 그 만남은 수가 엄청났다고 한다. 이런 만남은 클럽뿐만 아니라 목욕탕까지 이어져 돈독한 우정을 같이 했다는 말은 어디서 듣지 못하는 이야깃거리였다.
목욕탕 동기로는 이 밖에도 어니언스의 임창제가 있었고, 그는 워낙 목욕을 좋아라 하는 인물이었다고 말을 해 주었다. 거의 매일 같이 만나는 사이들이 이 사이였다고 한다. 자연스레 아지트가 되어준 곳이 클럽 꽃잎과 목욕탕이었으니 당시 시대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가수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었다. 가수 김정호 씨가 대마초 사건으로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고,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들어온 곳이 바로 꽃잎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당시 명가수로 유명했던 김정호를 필두로 많은 가수들이 노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었다! 라고 말을 하며 옛 생각에 잠시 잠기기도 했다.
인터뷰를 통해서 만나 본 전유성 씨의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추억의 한 부분이었고, 계속해서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여유롭지 못해 멈추게 됐다. 남은 이야기는 또 하나의 공간인 그의 콘서트를 통해서 보여졌다.
당시 공연이 되었던 뮤지컬 콘서트 <무교동 꽃잎>은 70년대 무교동 꽃잎과 명동의 쉘부르 등 유명한 곳의 시절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 멋진 공연으로 기억에 남았다. 포크 음악 40주년을 맞이해 기억 속으로 떠나는 여행의 자리가 된 꽃잎 공연은 추억과 낭만을 찾아준 그런 공연이었다.
우연히 찾아온 그와의 만남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는다. 동시에 같은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소리새 신성철 씨와 클럽 꽃잎 최송무 사장과의 만남 또한 멋진 기억으로 남은 자리였다.
<사진. 바람나그네의 미디어토크 제공>